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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 교인을 만나본 친구가 흥미로운 이야기를 해줬습니다. 그 친구가 만난 무슬림은 기도도 안 하고, 라마단도 안 지키고, 사실상 세속적인 삶을 산다고 합니다. 그런데 딱 하나, 목숨 걸고 지키는 것이 있었으니 바로 '돼지고기 안 먹기'입니다.
마호메트의 가르침은 자기 삶과 아무 관련이 없는데, 오직 '돼지고기를 입에 대지 않는 행위' 하나를 최후의 보루처럼 붙들고 "나는 무슬림이다"라고 주장하는 모습. 어떻습니까? 이것이 참된 신앙처럼 보입니까? 아니면 껍데기만 남은 고집처럼 보입니까?
1. 한국 교회의 '최후의 보루', 술과 담배
이 이야기를 들으며 쓴웃음이 나왔습니다. 남의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한국 기독교인들에게도 이와 비슷한 '최후의 성역'이 있습니다. 바로 금주(禁酒)와 금연(禁煙)입니다.
교회 밖에서는 사기를 치든, 욕심을 부리든 상관없이, 교회 안에서는 딱 하나로 '진짜'와 '가짜'를 판별합니다. "저 집사는 술 마시네? 가짜네. 잡사네." 거짓말하고 미워하는 것은 은근슬쩍 넘어가도, 술잔을 드는 것은 용서받지 못할 죄가 됩니다. 금주가 어느새 성도의 거룩함을 증명하는 유일한 지표이자 정체성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과연 이것이 바람직한가요?
2. 금주 규약은 성경이 아닌 '역사의 산물'
팩트를 짚고 넘어갑시다. 성경 어디에도 "술을 입에 대는 자는 지옥에 갈지어다"라는 구절은 없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포도주를 즐기셨고, 바울은 디모데에게 건강을 위해 포도주를 권하기도 했습니다.
한국 교회의 엄격한 금주/금연 규율은 일제 강점기 초기 선교사들이 만든 역사적 산물입니다. 당시 한국에 들어온 선교사들은 청교도적 배경을 가진 근본주의 성향이 강했습니다. 게다가 당시 조선인들은 나라 잃은 슬픔을 독한 술과 도박으로 달래며 피폐한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이를 갱생시키기 위한 사회운동적 차원에서 '금주, 금연'을 강력한 교회법으로 정착시킨 것입니다. 즉, 신학적 이유보다는 시대적 필요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3. 본질은 '자유'에 있습니다
그로부터 100년이 지났습니다. 시대가 변했고, 문화가 바뀌었습니다. 여전히 그 100년 전의 잣대로 신앙의 유무를 판단하는 것은 촌극입니다.
물론 술에 취해 방탕한 삶을 사는 것은 성경이 경계합니다. 하지만 '한 잔이라도 입에 대느냐 아니냐'로 정죄하는 율법주의는 복음과 거리가 멉니다.
밥먹는교회는 이 낡은 족쇄를 풀고자 합니다. "술 좀 마셔도 됩니다. 담배 좀 피워도 됩니다." 그것이 당신의 구원을 취소시키지 않습니다.
우리가 집중해야 할 것은 '무엇을 먹고 마시느냐'가 아닙니다. '어떻게 이웃을 사랑할 것인가', '어떻게 예수를 닮아갈 것인가'입니다. 돼지고기 안 먹는 것으로 무슬림 흉내를 내는 것보다, 차라리 삼겹살에 소주 한 잔 기울이며 진솔하게 삶의 아픔을 나누는 것이 더 예수님의 식탁에 가깝지 않을까요?
결론: 껍데기를 깨고 본질로
이제 유치한 딱지치기는 그만합시다. 술 마시면 가짜고, 안 마시면 진짜라는 이분법에서 벗어납시다. 하나님은 당신의 위장(胃腸) 속에 알코올이 들어갔는지를 검사하시는 분이 아니라, 당신의 심장(心腸) 속에 사랑이 있는지를 보시는 분입니다.